'기타정보/배움의 기술' 카테고리의 글 목록 :: 친절한 유다맨

배움의 기술

 

 

영화 <바비 피셔를 찾아서>의 실재 주인공 조쉬 와이츠킨이 쓴 <배움의 기술(The Art of Learning)>의 발췌. 조쉬 아이츠킨은 체스의 신동 소리를 듣던 사람인데, 영화가 나온 이후로 일종의 연예인이 돼버린다. 한창 사춘기 때 가는 곳마다 여학생들이 난리법석을 피우는 느낌은 어떨까. 물론 모든 사춘기 소년의 꿈이겠지만 막상 당하는 사람에게는 상당한 포스의 독이 되리라는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탓에 와이츠킨은 일찌감치 마음 다스리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 즈음 접하게 된 것이 태극권이다.

 

전혀 다를 것 같은 체스와 태극권. 하나는 머리를 쓰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몸을 쓰는 일이지만 와이츠킨이 느낀 것은 결국 ‘배움’이라는 줄기에서 뻗어나온 두 개의 다른 가지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와이츠킨은 태극권에서도 챔피언의 경지에 오른다.

 

원래 이런 류의 책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자기계발 류의 책은 한 두권 정도 읽으면 그 얘기가 그 얘기이고, 또한 요즘 나오는 것들은 알맹이 없는 속빈강정인 경우가 흔한 까닭이다. 이런 책을 고르는데는 하나의 원칙을 세웠는데, 그것은 책을 쓴 사람이 실제로 그 책 내용을 체험한 사람이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따위의 책은 빈털털이였던 저자가 ‘부자되는 법’에 대한 책을 써서 부자가 된 가당찮은 경우이다. 이런 류의 책은 책의 내용이 아무리 옳더라도(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사기에 불과하다. 심리학자 등속의 ‘학자’들이 쓴 자기계발서도 죄다 빈 껍데기 언어의 나열에 불과한 경우가 다반사. 실질적 경험에서 나오는 말과 머리에서만 머문 관념적 언어는 천양지차다.

 

그래서 ‘배움’에 대한 책을 쓴다면 그 저자가 배움에 대해서는 일가를 이룬 사람이어야 하고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와이츠킨은 자격이 있다. 다만 그가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것이 독이다.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팔딱팔딱 뛰는 아이디어를 관념적 언어로 장식을 하느라,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보석 위에 진흙을 쳐바른 듯한 느낌 때문에 속이 뭉쳐오곤 한다.

 

원래 따로 떼어서 올린 글들을 하나로 묶어서 다시 올려본다.

 

배움에 대한 두 가지 접근법

 

“두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첫째, 정상에 오르는 소수의 사람이 나머지 사람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둘째, 확률적으로 정상에 오를 가능성이 거의 없는 데, 잘 하려고 노력할(pursuing excellence) 필요가 무에 있나?

 

이에 대한 답은 다음의 세 가지 요소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 불굴의 정신(resilience), 둘, 우리가 삶에서 벼르는 여러 목표의 연계점을 찾는 것. 그리고 셋, 매일 매일 그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

 

대개 배움에 대한 접근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발달 심리학자들은 설명한다. 하나는 도 아니면 모라는 생각에 바탕을 둔 접근이고, 또 하나는 차근차근, 하나 하나 단계를 밟아 정복해 가는 과정으로 ‘배움’을 보는 접근법이다. 전자(前者)는 ‘배움’을 하나의 ‘객체’ 또는 ‘실체’로 보는 것으로, 다 얻지 못하면 하나도 얻지 못한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방식이기 때문에 배움의 ‘실체entity’이론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후자(後者)는 배움을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과정’으로 보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절차적, 단계적 incremental’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실험 하나를 해보면 이 두 가지 접근법의 차이가 또렷이 도드라진다.

 

우선 아이들에게 아주 쉬운 문제를 내준다.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문제의 정답을 맞춘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아주 어려운 문제를 내준다. 이번 문제의 정답을 맞춘 아이는 거의 없다. 이 때 아이들의 반응을 보면, 어떤 아이들은 어려운 문제를 만나서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흥분하고, 어떤 아이들은 완전히 얼어 붙어 버린다. 결과는 둘 다 정답을 맞추지 못하지만, 서로 접근법이 다른 두 그룹의 아이에게 있어서 다음 문제를 푸는 데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즉, 이번에는 다시 쉬운 문제를 내준다. 당연히 모두 맞추어야 하지만 ‘실체’적 접근법을 취한 아이들은 자신이 충분히 맞출 수 있는 문제인데도 포기해 버린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이러한 류의 문제에 ‘재능이 없는 것’을 발견해 버렸기 때문이다.”

 

우물안의 개구리

 

“  한 번은 아리조나에 내려가서 강의를 하고 지도 체스 ? 동시에 20~50명과 두는 체스(정식 용어는 simultaneous exhibition, 보통은 줄여서 simul이라고 한다)를 둔 적이 있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는데, 행사장으로 가는 길에 아들 자랑 단지에 뿔이 났다. 일 년 넘게 체스 게임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 들으면 대충 상황 유추가 된다. 우물 안 개구리 이야기다.

 

그 아이를 만나보니 어느 정도 재능이 있는 아이였다. 자신의 학교에서는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체스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포석(opening attacks)과 묘수 몇 개를 배워서 다른 아이들을 압도했고, 체스의 기본에 대해서도 감이 있는 아이였다. 이러다 보니 모두가 천재 났다고 띄워주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자기가 이길 수 있는 학교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 외에는 절대 게임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 아이가 가장 자주 게임을 하는 상대는 제 아버지였다. 학교 친구들에게 있어서 이 아이는 체스의 신이었지만, 전국에 좀 한다 하는 아이들에 비해서는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였고, 그 아이는 그 상태를 선호했다.

 

행사 내내 그 아이는 체스를 두려 하지 않았다. 지도 대국에서도 두려 하지 않았고, 내 지도에 따르는 것을 거부한 유일한 아이였다. 완벽한 겉모습에 금이 가는 것을 너무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소라게로부터 배우는 교훈

 

탁월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길고 긴 과정, 고속도로가 아니라 자갈밭 길로 가는 여정(旅程)을 포용함이다.  ‘웬만큼’ ‘대충’ ‘남들만큼’이라는 껍질 속의 안락함과 편안함을 깨뜨리고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성장은 성장통을 동반한다. 탁월함의 추구는 이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소라게(hermit crab)이라는 것이 있다. 이 게는 몸통이 말랑말랑하고 자기자신의 껍질을 가지고 있지 않는 탓에, 빈 소라 류의 껍질을 달고 다니면서 그 속에 숨어 산다. 따라서 성장함에 따라 더 큰 소라 껍질이 필요해지며, 소라게는 지금까지 숨어 지내던 껍질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보호막을 찾아 떠나야 한다. 이 여정이 짧은 경우는 괜찮지만 여정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목숨은 위험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라게는 더 똑똑해지고, 더 현명해지고, 더 강해진다. 껍질과 껍질 사이의 배움의 틈새, 이것만이 성장으로 인도할 수 있다.

 

***

 

이런 아이들이 있다. 재능이 있든 주제 자체가 쉽든 간에 자신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고 조금 어려운 것은 기피하는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은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하든지, 농구에서 골을 넣지 못하면 “진짜로 한 게 아니야( I wasn’t really trying)”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는다. 물론 이러한 아이들이 평생  뭔가를 진짜로 하는 법은 없다.

 

고수와 하수를 가르는 것

 

맨해튼의 거리는 분주하다. 그리고 무법천지다. 신호를 위반하는 차는 예사고 일방통행을 거슬러 오는 자전거도 흔하다. 혼잡한 보행자들의 흐름을 운전자들은 마치 곡예를 하듯이 빠져 나간다. 뉴요커들은 이러한 환경에 익숙하다. 사이렌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 스치듯 지나치는 택시들, 이러한 것들에 무신경하다. 그저 익숙한 일상일 뿐이다. 기적처럼 모든 것들이 별 탈 없이 작동한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이 조금만 어긋나도 큰 사고로 이어진다.

 

그녀는 나로부터 몇 미터 앞에 서 있었다. 정장 차림의 미인이었다. 귀에는 헤드셋을 꽂고 음악에 맞추어 몸을 조금씩 흔들고 있었다. 그녀의 헤드셋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느닷없이 그녀는 차도로 발을 내디뎠다. 혼란스러운 일방통행 거리에서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차가 오나를 확인해야 할 방향이 틀렸다.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차는 왼쪽에서 오는데 그녀의 고개는 오른쪽으로 돌려진 채 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왼편에서 자전거 한 대가 튀어 나왔다. 자전거를 탄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그녀를 보고 놀랐지만 가까스로 큰 사고는 피할 수 있었다. 약간의 접촉이 있었지만 그녀는 다치지 않았다.

 

이 때 그녀는 다시 보도로 되돌아왔어야 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리고 큰 사고가 나지 않는 것에 감사하며 돌아왔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만 하고 내빼는 자전거 탄 사람에게 욕을 퍼붓느라 그녀는 계속 차도에 서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 순간 또 하나의 물체가 그녀를 덮쳤다. 이번에 그녀는 전만큼 운이 좋지 않았다. 트럭이었다. 그녀가 트럭에 받쳐 튕겨 나가는 장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나의 눈에 잡혔다. 시간은 그 순간 그대로 정지된 듯했다.

 

이것은 그녀의 운명이었을까? 이 비극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녀는 틀린 방향을 보고 건너려 했다. 이것이 그녀의 첫 번째 실수였다. 그리고 자전거에 접촉하는 사고가 났을 때 그녀는 첫 번째 실수를 깨닫고 그 실수를 만회해야 했다. 다시 보도로 돌아옴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편안한 살이에 파문을 일으킨 그 괘씸한 자전거에 대한 화가 그녀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 이로써 애초에는 별 것 아니었던 실수를 강화하게 된다. 이번의 실수는 치명적이었다.

 

***

 

실수를 한 다음 이로부터 즉각 회복하는 것, 다시 집중력을 회복하고 맑은 정신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승부사들과 퍼포머(performer)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첫 번째 실수는 대부분 치명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 첫 번째의 기우뚱거림을 바탕으로 두 번째, 세 번째의 실수가 이어지면 결국 연쇄반응을 일으켜 침몰해 버린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나선형의 하향곡선(downward spiral)이다.

 

사람들은 여세(餘勢, momentum)라는 것을 마치 하나의 실체인 양 이야기한다. 마치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제 3의 선수인 양 여긴다. 승부의 세계를 어릴 때부터 전전해 온 나로서도 이 여세의 실체성을 믿을 수밖에 없다. 마치 파도를 타는 것처럼 이 여세를 내 편에 놓고 몰아야 한다. 이 파도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고 멍하니 있으면 그대로 빠져버린다. 흐름을 타고 다시 파도에 편승해야 한다. 이를 얼마나 빨리, 그리고 효율적으로 하느냐에 승부는 갈린다.

 

***

 

체스나 운동경기와 같은 승부의 세계가 아닌 다른 분야라고 하더라도 톱에 오르는 사람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실수를 흐름 속에 묻어버린다는 점이다. 위대한 배우가 무대 위에서의 실수를 관객이 보기에는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짜여 있는 것처럼 여길 만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수를 승부나 일에서의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지 않고 완벽한 승리나 완벽한 일의 결과에 대한 흠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실수는 두려움을 낳고, 불확실성을 낳으며,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의사결정능력은 흐릿해지고 결국 하향곡선을 타게 되고 만다.

 

두 천재의 공통점

 

앞에서 언급했듯이 브루스 스승님은 나에게 마무리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는 대부분의 다른 아이들이 포석(opening variations)부터 배우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스승님은 빈 체스판을 내 앞에 내 놓았다. 단순화된 형태, 그러나 원리 원칙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형(形, positions)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첫 초점은 단 세 개의 말로 구성된 형(形)이었다. 킹과 폰(pawn),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킹.

 

[▶체스에서 중요한 것 중에 opposition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 말로 하면 맞짱 포지션 정도 될까? 킹과 킹 사이의 사각형의 수가 홀수 일 때 두 킹은 맞짱 포지션에 있다(the kings are in opposition), 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킹의 힘과 폰의 섬세한 역할에 대한 직관적 감(感)을 얻게 되었다. <opposition>에 관한 원리를 배웠고 빈 공간이 내포하고 있는 숨겨진 힘에 대해서도 배웠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쭈크쯔방(zugzwang, 바둑의 급소 치중(置中)과 비슷)에 대해서도 감을 터득해 나갔다. 스승님과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원리 원칙 자체가 아니었다. 그 원리 원칙들을 나의 창의적 직관으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한 겹 한 겹 켜켜이 쌓아 나갔다. 그 후 수 백 시간에 걸쳐 거의 모든 마무리의 형(形)을 연마했다. 루크(rook), 비숍, 나이트 마무리 등등.

 

이러한 훈련은 나로 하여금 가지가 아니라 줄기와 뿌리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배움의 기술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내재화(內在化)시키고 있었다. 곧, 지식과 직관, 그리고 창의력 사이의 상호작용이었다. 나의 교육은 밑에서부터 시작해서 위로 올라가는 형태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아이들은 포석(布石, opening variations)부터 배웠다. 어떤 식으로 판을 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수 많은 변형과 이론이 존재한다. 이러한 포석의 형(形)을 배움으로써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함정과 지뢰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쉽게 이길 수 있게 된다. 아주 매혹적이다. 조금만 배워도 성과가 바로 나온다.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포석부터 시작하는 아이들은 일종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평생 동안 새로운 포석의 형(形)을 외우는 데 시간을 허비해야 하고 계속 업데이트되는 ECO(Encyclopedia of Chess Openings)를 따라 잡아야 한다. 중독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배움이 가장 나쁜 점은 ‘배움’ 자체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을 터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 있어서 체스는 결과다. 승부의 결과다. 성과다.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다. 배우는 것은 이를 위한 필요악일 뿐이다.

 

[▶우연히 이창호에 대한 글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부분을 발견했다. 글은 '이창호가 강할 수밖에 없는 세가지 이유'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둘째로 테크닉적인 면인 ‘끝내기’의 완벽도를 들 수 있다. 보통 바둑계의 상식으로, 끝내기 부문은 포석과는 달리 공부로 되는 분야가 아니다. 끊임 없는 경험과 연륜이 쌓여 터득되는게 끝내기인데 이창호는 어린 나이부터 포석과 중반부문에 앞서 이 마무리 부문부터 먼저 도통하는 기현상을 보였다(이것은 바둑계에서조차 불가사의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출처: LeeChangHo.com

 

배움에 있어 쉬이 빠지는 함정

 

로버트 퍼직(Robert Pirsig)이 쓴 ‘선(禪)과 모터 사이클 정비(Zen and Motorcycle Maintenance)’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이 소설의 주인공 피두러스가 어느 시골 대학에서 작문 강사로 재직할 당시 학생들에게 그 대학이 있는 동네, 즉 대부분의 학생들이 태어나고 자란 그 자그마한 마을에 대해서 글짓기를 해오라는 숙제를 내준다.

 

여학생 한 명이 이 숙제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단 한 글자도 쓸 수 가 없었다. 도대체 이 조그만 동네, 아무 것도 없는 동네에 대해 쓸 말이 무에 있을까? 흥미로운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피두러스를 찾아가서 하소연한다.

 

그녀의 하소연을 다 듣고 난 피두러스는 숙제를 바꾸어준다. 동네에 대해서 쓰지 말고 학교 앞에 있는 조그만 극장에 대해서 쓰라고 말한다. 글의 첫머리는 왼쪽 상단의 벽돌부터 시작하라고 지시한다. 처음에 그녀는 이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지만 그 다음 날 20페이지에 달하는 멋진 작문을 해왔다. 그 동네는 너무 작은 것이 아니라 너무 컸던 것이다.

 

내 생각에 이 이야기는 탁월함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성패를 가르는 교훈을 주고 있다. 테마는 넓이가 아닌 깊이이다. 배움의 원리는 미세하고 신비로운 마이크로 세계를 뛰어들어 매크로 세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 산만의 세상에 살고 있다. 텔레비전, 휴대전화, 비디오 게임, 그리고 인터넷, 이런 것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보는 우리를 함몰시키고 있다. 이러한 자극들이 계속되면 우리는 중독될 수 밖에 없고, 좀 더 많은 정보, 좀 더 새로운 정보를 찾아 헤맨다.

 

금방 싫증이 나고, 금방 다른 데로 정신을 팔고, 금방 현재로부터 분리되어 나간다. 이런 상황에 빠지면 우리는 마치 수면에서만 펄떡이는 작은 물고기 신세가 되어 버린다. 2차원의 세계에 산다. 그 밑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심연(深淵)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이러한 삶의 맥을 끊지 않고 지속한다면 끝장이다.

 

[출처] [펌] 배움의 기술

+ Recent posts